6/25 우리 시대의 노인상
깐깐하고 무섭지만 속 깊고 정 많은, 게다가 같은 과부의 입장을 살펴 장성한 손자들이 셋이나 있는데도 손수 며느리의 재가를 서두르는 시어머니(SBS 종영, '화려한 시절')가 등장하고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배우는 즐거움이 좋아 실패를 알면서도 대학시험에 도전하는 할아버지(KBS제2TV 방영중, '내 사랑 누굴까')는 집안을 이끌어 가는 정신적인 지주다.
과부 시어머니라면 의례적으로 심술 많고 혹독하게 며느리 들볶는 캐릭터로 고정되고 드라마 안에서 비중도 없이 밥상머리나 지키는 것이 고작이던 할아버지의 역할이 언제부터 이렇게 중요해졌더란 말인가.
영화가 노인들의 모습을 다양하고 깊이 있게 그리되, 생활과 연결하기 위해서는 '소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스스로의 노력과 생각이 필요한 것에 비해 현실적 가치관을 그대로 투영하기도 하고 바램일 뿐인 '이상'을 자잘한 일상 속에 슬쩍 끼워넣어 그럴싸하게 재현해내는 드라마는 변모해 가는 우리시대의 노인상을 가장 광범위하고 삶에 밀착한 형태로 수용하고 있다.
생활과 밀접한 드라마라는 도구로 바람직한 가족상, 젊은이들이 바라는 노인, 노인들이 바라는 젊은이의 모습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가의 으뜸은 단연 드라마의 여왕 김수현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발이 신드롬까지 일으켰던 '사랑이 뭐길래'에서는 개성있고 다양한 할머니 세 명을 맛깔스런 양념 이상의 캐릭터로 그려내더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는 아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가 세 딸들의 로맨스를 풀어가고 며느리들간의 분쟁의 조정자로서 집안의 굳건한 중심이 되기에 이른다. 김수현이 편애해 마지않는 배우 '이순재'와 '강부자'가 비현실적이리 만큼 공명정대하고 멋진 개성을 지닌 노인타입으로 굳어진 것도 바로 이 드라마에서였는데, 특히 맏며느리에게 여성동지의 입장에서 충고하고 다독이는 모습은 지금까지도 길이 기억되는 훌륭한 시어머니의 전형으로 남아있다. 현재 방영중인 '내 사랑 누굴까'는 다른 김수현의 드라마들과 달리 월드컵 등 시기적인 악재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이런 멋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디 없소''를 외치고 있다. 극중 할아버지(이순재 분) 할머니(여운계 분)는 집안 좋고 똑똑한 맏손자며느리를 들이면서 가난한 집안에서 출가해온 둘째 손자며느리가 기죽을 것을 염려해 마음을 쓰고, 손자들의 고민을 아버지보다 더 열린 마음으로 들어준다. 이렇듯 김수현의 드라마 속 노인들은 한결같이 현재 젊은이들의 부모세대인 40∼50대보다 더 깊은 연륜과 너그러움으로 젊은이들을 계도하고 포근하게 싸안는다. 김수현이라는 작가 이전의 드라마와 이후의 드라마는 주변 가족들, 특히 집안에서의 어른 역할을 다루는 입장에서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어찌할 수 없는 가족간의 갈등관계를 다룰 때는 각 세대간의 입장을 모두 설득력 있게 그리다보니 대사량은 많아지고 가끔은 극화되지 않은 작가의 의도가 구호처럼 묻어나 시청자를 거북스럽게 만들기도 하는 게 사실이지만, 전통적 멜로드라마에서 젊은 남녀간 사랑에 훼방꾼 역할이나 맡고 있던 집안 어른들을 '가족멜로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 안에서 젊은 연인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 지지자이자 이야기의 주변인에서 탈피한 대등한 주인공으로까지 변화시킨 공을 따질 때 김수현이라는 작가를 빼놓고서는 얘기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정갈하고 깔끔하며 책임감 강한 일본인의 모습은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전파력이 높은 연극과 동화를 이용,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국민정서를 형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교화한 모습이란 점을 상기할 때 드라마와 같은 생활 속 매체가 갖는 가공할 자기암시의 효과에 대해 모두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즘은 나라 전체가 월드컵 이야기로 하루해가 뜨고 지는 판이지만 이 열풍만 지나면 하루 4∼5시간 이상 TV를 보는 노인들, 그리고 집안의 노인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며느리들이 즐겨보는 프로그램은 다시 평일 아침, 저녁과 주말 황금시간대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드라마들이 될 것이다. 이런 드라마 매체의 영향력에 비춰볼 때, 존경하고 배울만한 노인, 그런 노인을 대접할 줄 아는 젊은이의 모습처럼 전통과 현대가족의 문제를 조율하는 균형 있는 시각과 책임의식은 모든 작가들이 갖춰야할 기본적인 덕목이라 할 것이다. (시니어저널 2002-06-24)
2002-06-25 09:40:22